한수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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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수(後漢)는 후한 말 서량 지역의 군벌로, 강족의 지지를 받아 량주 반란에 참여했다. 그는 변장, 북궁백옥 등과 연합하여 동탁 휘하의 정부군에 대항했으나 패배했다. 이후 세력을 키워 농서군을 공격하고, 마등과 연합하여 왕국을 추대하기도 했다. 이후 이각과의 대립, 마등과의 갈등을 겪었으며, 조조와의 동관 전투에서 패배한 후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마초의 부하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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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 (후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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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한수 |
본명 | 한약 |
자 | 문약 |
출생 | 미상 (145년 이전 추정) |
사망 | 215년 |
출신지 | 량주진청군 |
관직 및 직위 | |
최종 관직 | 정서장군 |
기타 관직 | 안강장군 (195–201) 진서장군 (192–195) |
소속 | |
초기 소속 | 하진 |
이후 소속 | 독립 세력 → 마등 → 독립 세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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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음 |
2. 초기 생애 및 변장·한수의 난
후한 말 영제 시대에 한수(韓遂, 당시 이름은 한약(韓約))는 변장(당시 이름 변윤(邊允))과 함께 서량 지역에서 명망이 높았던 인물이다.[1] 계리로서 낙양에 갔을 때 대장군 하진에게 환관 세력을 숙청할 것을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향으로 돌아갔다.[1]
광화 7년(184년), 양주에서 강족과 호족들이 일으킨 반란에 변장과 함께 연루되어 반란군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2][3] 이는 이후 약 5년간 지속된 변장·한수의 난의 시작으로, 한수는 이 과정에서 원래 이름인 한약 대신 한수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2][3]
한수와 변장이 이끈 반란군은 초기에는 삼보 지역까지 진출하는 등 기세를 떨쳤으나, 후한 조정에서 파견한 장온, 동탁, 황보숭 등과의 거듭된 전투에서 패배하고 내부 분열을 겪으며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다.[3][2] 이 과정에서 한수는 변장, 북궁백옥, 이문후 등 초기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반란군의 실권을 장악했으며,[3] 이후 마등과 연합하여 양주 지역의 유력 군벌로 자리 잡게 된다.[3][1][2] 이 시기 한수의 행보는 후한 말 중앙 정부의 통제력 약화와 지방 세력의 발흥이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이루어졌다.
2. 1. 초기 생애
영제 시대에 변윤과 함께 서방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1] 계리로서 낙양으로 갔을 때 대장군 하진의 눈에 띄었다. 이때 한수는 하진에게 환관을 모두 죽일 것을 진언했지만, 하진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고향으로 돌아갔다.[1]184년, 양주에서 강족을 비롯해 포한현과 하관현의 도적, 송건, 왕국 등이 반란을 일으켜 북궁백옥과 이문후를 장군으로 추대했다. 이들은 금성군으로 와서 항복하는 척하며 변윤, 한수 등 수십 명을 인질로 잡고, 호강교위 영징과 금성태수 진의를 살해했다. 반란군은 변윤과 한수를 풀어주고 그들을 군 지도자로 옹립하여 군정을 맡겼다.[2][3] 이 사건으로 농서군에는 변윤과 한수가 반란에 가담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양주에서는 두 사람에게 현상금을 걸었다. 이때 변윤은 이름을 변장으로, 한수는 원래 이름인 한약(韓約)에서 한수(韓遂)로 개명했다.[2][3] 다른 기록에서는 송양(宋揚), 북궁옥(北宮玉) 등이 반란을 일으켜 변장과 한수를 옹립했다고도 한다.[1]
한수 등은 주군(州郡)을 불태우고, 185년 3월에는 삼보 지방까지 침입했다.[2] 후한 조정은 황보숭과 동탁을 토벌군으로 파견했으나, 황보숭이 성과를 내지 못하자 8월에 장온을 사공으로 삼아 여러 군의 병력을 이끌고 미양에 주둔하게 했다.[2][3] 곧이어 한수 등도 미양에 도착하여 장온, 동탁 등과 교전하여 처음에는 승리했으나, 11월 동탁 등의 반격에 크게 패하여 유중으로 퇴각했다.[3] 이듬해 장온이 수도로 소환되자, 한수는 변장, 북궁백옥, 이문후를 살해하고 군세를 장악하여 농서를 포위했다.[3] 다른 기록에 따르면 변장이 병사하자 한수가 그 뒤를 이어 반란군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한다.[1]
187년, 양주자사 경비가 부하 간신들을 신임하자 저와 강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한수가 이에 호응하자 경비는 직접 진압에 나섰다. 한양군 태수 부섭이 위험하다고 간언했으나 듣지 않고 적인까지 진군했다가 부하의 배신으로 살해당했다.[2] 한수 등은 기세를 몰아 한양군을 포위하고 저항하던 태수 부섭마저 살해했다.[2] 이때 경비의 사마였던 마등도 반란에 가담하여 한수와 합류했고, 이들은 왕국을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하여 다시 삼보 지역을 침공했다.[2][3] 188년, 한수 등은 진창성을 포위했으나 황보숭과 동탁에게 패배했다. 이 패배의 책임을 물어 왕국을 추방했고, 왕국은 혼란 속에서 사망했다.[2][3] 이후 한수를 비롯한 반란군 지도자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져 서로 죽이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로 인해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3]
192년, 동탁 사후 이각과 곽사가 여포를 몰아내고 장안에서 정권을 잡자, 한수와 마등은 이각 등에게 복종의 뜻을 보이며 장안으로 향했다. 한수는 진서장군에 임명되어 양주로 돌아갔고, 마등은 정서장군에 임명되어 미에 주둔했다. 194년, 마등은 입장을 바꿔 조정의 반(反)이각 세력 및 익주의 유언과 연계하여 장안을 공격했다. 한수는 마등과 이각 사이를 중재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결국 마등과 합류했다. 그러나 유언 군과의 협공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면서 번조와 곽사에게 크게 패배했다.[3] 한수는 진창까지 도망쳤다가 번조에게 따라잡혔으나, 과거 안면이 있던 사이였기에 번조가 그를 놓아주었다.[3] 양주로 돌아온 한수는 마등과 다시 관계를 회복하여 의형제를 맺는 등 초기에는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이후 양주의 지배권을 두고 마등과 다시 대립하게 되었고, 서로 군대를 동원해 싸우며 상대방의 처자식을 죽이는 등 극심한 갈등 관계로 발전했다.
197년, 조조는 원소와의 대결을 앞두고 관중 지역의 안정을 위해 종요를 사예교위로 임명하여 파견했다. 종요는 장안에 머물며 위위 장기를 사자로 보내 한수와 마등의 갈등을 중재했다. 장기와 양주목 위단의 설득으로 한수는 마등과의 싸움을 멈추기로 맹세하고, 아들을 인질로 조조에게 보내며 그의 휘하로 들어갔다.
2. 2. 변장·한수의 난 (184년 ~ 189년)
영제 시대에 한수(당시 이름 한약)는 변장(당시 이름 변윤)과 함께 서량 지방에서 명망이 높았다("무제기" 인용 『전략』). 그는 계리(計吏)로서 낙양에 갔을 때 대장군 하진의 눈에 띄어 환관 세력을 제거할 것을 진언했으나, 하진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무제기" 인용 『전략』).광화 7년(184년), 양주에서 강족과 월지의 호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북궁백옥과 이문후를 장군으로 추대했다. 이들은 금성군으로 진군하여 항복하는 척하면서 당시 금성군에 있던 변장과 한수를 포함한 수십 명을 인질로 잡고, 호강교위(護羌校尉) 영징(伶徵)과 금성태수 진의를 살해했다. 이후 반란군은 변장과 한수를 풀어주고 그들에게 군대의 지휘를 맡겼다. 이 일로 농서군 일대에는 변장과 한수가 반란에 가담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양주자사는 두 사람에게 현상금을 걸었다. 이에 변윤은 이름을 변장으로, 한약은 한수로 바꾸었다(후한서 "영제기", 후한서 "동탁전", 후한서 "동탁전" 인용 『헌제춘추』). 일설에는 송양(宋揚)과 북궁옥 등이 반란을 일으켜 변장과 한수를 지도자로 추대했다고도 한다("무제기" 인용 『전략』). 한수는 영제 통치 기간 동안 부패한 환관을 처단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량주 반란에 참여했다.
중평 2년(185년) 3월, 한수와 변장 등은 군사를 이끌고 삼보 지역까지 침입하여 여러 군현을 불태웠다. 조정에서는 황보숭과 동탁을 보내 토벌하게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황보숭은 책임을 물어 파면되었다. 8월, 조정은 사공 장온을 거기장군으로 삼아 대규모 토벌군을 편성하여 미양(美陽)에 주둔시켰다("영제기", 후한서 "동탁전"). 한수 등도 곧 미양에 도착하여 장온, 동탁의 군대와 교전하여 초반에는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11월, 동탁이 이끄는 부대의 반격으로 크게 패하여 유중(楡中)으로 퇴각했다(후한서 "동탁전"). 장온은 탕구장군(盪寇將軍) 주신에게 군사를 주어 이들을 추격하게 했다. 당시 주신의 부장이었던 손견은 적의 보급로를 먼저 차단할 것을 건의했지만, 주신은 이를 듣지 않고 곧바로 유중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한수와 변장이 역으로 정부군의 보급로를 끊어버리자, 주신은 별다른 소득 없이 군사를 물릴 수밖에 없었다.
중평 3년(186년), 장온이 낙양으로 소환된 후, 한수는 변장, 북궁백옥, 이문후를 살해하고 반란군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일설에는 변장이 병으로 죽자 한수가 그 뒤를 이어 맹주가 되었다고도 한다("무제기" 인용 『전략』). 한수는 군세를 정비하여 10만 명을 거느리고 농서를 포위 공격했다.
중평 4년(187년), 농서태수 이상여(李相如)는 한수에게 항복했다. 당시 양주자사 경비(耿鄙)는 부하들의 신망을 잃고 있었는데, 저족과 강족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한수도 이에 호응했다. 경비는 한양태수 부섭의 만류를 뿌리치고 직접 토벌에 나섰다가 적도(狄道)에서 부하의 배신으로 살해당했다("영제기", 후한서 "부섭전"). 한수는 기세를 몰아 한양군을 포위하고 격렬히 저항하던 태수 부섭마저 살해했다. 이 무렵 경비의 사마(司馬)였던 마등도 휘하의 군사들을 이끌고 한수에게 합류했다. 한수와 마등은 세력을 합쳐 적도 사람 왕국(王國)을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하고 다시 삼보 지역을 공격했다("영제기", 후한서 "동탁전").
중평 5년(188년), 왕국을 중심으로 한 반란군은 진창(陳倉)을 포위했으나, 조정에서 파견한 황보숭에게 격파되었다. 연이은 패배에 반란군 내부에서는 분열이 일어났고, 한수는 책임을 물어 왕국을 참수했다(혹은 추방했다). 왕국은 혼란 속에서 사망했으며("영제기", 후한서 "동탁전"), 이후 한수를 비롯한 반란군 지도자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져 서로 죽이는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세력은 크게 약화되어 흩어졌다(후한서 "동탁전"). 이 시기를 기점으로 변장과 한수가 주도한 초기 양주 반란은 점차 세력을 잃어갔다.
3. 이각과의 대립 (192년 ~ 196년)
동탁 사후 이각이 정권을 장악한 초평 3년(192년), 장안에 도착한 한수는 마등과 함께 이각으로부터 각각 진서장군(鎭西將軍)과 정서장군(征西將軍)에 임명되어 량주로 돌아갔다.[1][2] 일부 기록에서는 이각 등이 정권을 잡자 한수와 마등이 먼저 공순의 뜻을 보이며 장안으로 갔다고도 한다.[3]
흥평 원년(194년), 마등은 이각에게 식량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군사를 일으켜 장안을 공격하려 했다. 한수는 처음에는 마등과 이각 사이를 중재하려 했으나, 결국 마등과 합세하여 장안으로 진격했다.[1] 이때 유언과도 연계하였으며, 장안 성내의 일부 신하들도 내응을 약속했다.[1] 그러나 이각이 곽사, 번조, 조카 이리(李利)를 보내 방어에 나서자, 한수와 마등의 군대는 장안 서쪽 21km 지점에서 크게 패하고 보급품 부족으로 량주로 퇴각했다.[1]
후퇴하는 과정에서 한수는 자신을 추격하던 번조와 마주쳤다. 한수는 번조와 동향인 점을 내세워 담소를 나누며 설득했고, 이에 번조는 추격을 멈추고 돌아갔다.[1] 그러나 이 일로 번조는 후에 이각에게 의심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1] 이각은 장안에서 내응하려던 자들을 처형한 뒤, 조정을 움직여 한수와 마등을 사면하고 각각 안항장군(安降將軍)과 안적장군(安狄將軍)으로 삼았다.
4. 마등과의 관계 변화 (197년 ~ 211년)
197년, 조조는 원소와의 대결을 앞두고 관중 지역의 안정을 위해 종요를 파견하여 한수와 마등의 싸움을 중재했다. 장기와 양주목사 위단의 노력으로 한수는 마등과의 싸움을 멈추고 조조에게 귀순하며 아들을 인질로 보냈다. 이후 한수와 마등은 원소와의 남은 전투에서 조조를 돕기도 했다.
그러나 건안 13년(208년), 의형제를 맺었던 마등과의 관계는 다시 극도로 악화되어 원수지간이 되었다. 이전부터 두 사람은 량주의 패권을 두고 싸우며 서로의 처자를 살해하는 등 깊은 원한 관계에 있었다. 조정에서는 다시 종요를 보내 이들을 화해시키고, 마등을 위위로 임명하여 수도인 업으로 불러들였다. 마등이 떠나면서 그의 군대는 아들 마초가 일부 통솔하게 되었다.
건안 15년(210년), 한수는 전년도에 옹주 자사 감릉상(또는 한단상)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킨 무위태수 장맹을 토벌하여 자결하게 만들었다.
건안 16년(211년) 3월, 조조가 종요와 하후연에게 군사를 주어 한중의 장로를 공격하게 하자, 한수를 비롯한 관중의 여러 세력들은 이것이 실제로는 자신들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이에 한수는 마초, 양추, 성의, 이감 등과 연합하여 10만 대군을 일으켜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 반란은 동관 전투로 이어지게 된다.
4. 1. 협력 관계
영제 시대에 변윤과 함께 서쪽 지방에서 명성이 높았다("무제기"가 인용한 『전략』). 계리(計吏)로서 낙양에 갔을 때 하진의 눈에 띄었으며, 이때 하진에게 환관 세력을 제거할 것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향으로 돌아갔다("무제기"가 인용한 『전략』).184년, 양주에서 강족과 여러 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북궁백옥, 이문후를 장군으로 삼았다. 이들은 금성군으로 와 항복하는 척하며 변윤, 한수 등 수십 명을 인질로 잡고 호강교위 령징과 금성태수 진의를 살해했다. 이후 반란군은 변윤과 한수를 풀어주고 그들을 지도자로 추대하여 군정을 맡겼다. 이 일로 농서군에서는 변윤과 한수가 반란에 가담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양주에서는 이들에게 현상금을 걸었다. 이때 변윤은 변장으로, 한수는 한수로 이름을 바꾸었다(후한서 "영제기", "동탁전", "동탁전"이 인용한 『헌제춘추』). 다른 기록에서는 송양, 북궁옥 등이 반란을 일으켜 변장과 한수를 추대했다고도 한다("무제기"가 인용한 『전략』).
한수 등은 주군(州郡)을 불태우고 185년 3월에는 삼보 지역까지 침입했다. 조정에서는 황보숭과 동탁을 파견했으나 황보숭이 성과를 내지 못하자 장온을 대신 보냈다("영제기", 후한서 "동탁전"). 한수 등은 장온, 동탁과 싸워 처음에는 승리했으나, 11월 동탁에게 크게 패하여 유중으로 물러났다(후한서 "동탁전"). 이듬해 장온이 소환되자, 한수는 변장, 북궁백옥, 이문후를 죽이고 군대를 이끌고 농서를 포위했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변장이 병사하자 한수가 그 뒤를 이어 지도자가 되었다고 한다("무제기"가 인용한 『전략』).
187년, 양주 자사 경비가 부하들의 신망을 잃자 저족과 강족이 반란을 일으켰고, 한수도 이에 합류했다. 경비는 이를 진압하려 했으나, 한양 태수 부섭의 만류를 듣지 않고 적인까지 진군했다가 부하에게 배신당해 살해되었다. 한수 등은 기세를 몰아 한양군을 포위하고 부섭마저 살해했다("영제기", 후한서 "부섭전"). 경비의 사마였던 마등 역시 반란에 가담하여 한수와 합류했고, 왕국을 지도자로 추대하여 삼보를 침공했다("영제기", 후한서 "동탁전"). 이듬해 진창성을 포위했으나 황보숭과 동탁에게 패배하자, 반란군은 왕국을 내쫓았고 왕국은 혼란 속에서 사망했다("영제기", 후한서 "동탁전"). 이후 한수를 비롯한 지도자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져 서로 죽이는 지경에 이르렀고, 세력은 흩어졌다(후한서 "동탁전").
190년, 동탁이 장안 천도를 논의할 때 반대하는 양표 등에게 한수 등이 천도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주장했다. 동탁 사후 이각, 곽사가 여포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자, 한수와 마등은 이들에게 복종의 뜻을 보이며 장안으로 갔다(위지 "동탁전"). 한수는 진서장군에 임명되어 양주로 돌아갔고, 마등은 정서장군에 임명되어 미에 주둔했다(위지 "동탁전", 촉지 "마초전"). 194년, 마등은 이각에 반대하는 세력 및 익주의 유언과 손잡고 장안을 공격했다. 한수는 마등과 이각 사이를 화해시키려 했으나 실패하자 마등과 합류했다. 그러나 기습 계획이 누설되어 번조와 곽사에게 크게 패했고, 한수는 진창까지 도망쳤다가 과거 안면이 있던 번조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후한서 "동탁전", 위지 "동탁전"이 인용한 『구주춘추』). 이후 양주로 돌아온 한수는 마등과 의형제를 맺는 등 처음에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으나("마초전"이 인용한 『전략』), 곧 양주를 두고 대립하여 서로 싸우게 되었다(위지 "종요전", "마초전"이 인용한 『전략』). 이 과정에서 한수가 마등의 처자식을 살해하면서 둘의 관계는 완전히 파탄났다.
197년, 조조는 원소와의 대결을 앞두고 관중의 안정을 위해 종요를 파견하여 이 지역을 총괄하게 했다("종요전"). 종요는 장안에 머물며 장기를 사자로 보내 한수와 마등의 갈등을 중재하려 했다. 장기와 양주 목사 위단의 노력으로 한수는 마등과의 싸움을 멈추기로 맹세하고, 자식을 인질로 보내 조조에게 복속했다("종요전", 위지 "장기전", "마초전"이 인용한 『전략』). 209년, 장맹이 옹주 자사 감릉상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이듬해 한수는 상소를 올려 장맹 토벌을 자청했고 결국 장맹은 자결했다(위지 "방유전"이 인용한 『전략』).
211년 3월("무제기"), 조조가 종요의 건의에 따라 한중의 장로를 정벌한다는 명분으로 하후연 등에게 군사를 일으키게 하자, 한수는 이것이 실제로는 자신들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이에 마초, 양추, 성의, 이감 등 관중의 여러 세력과 연합하여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무제기"). 홍농, 풍익 등지에서 많은 이들이 호응했으나, 두기가 태수로 있던 하동군만은 동요하지 않았다(위지 "두기전", 위지 "배잠전"이 인용한 『위략』 "엄간전"). 조조는 두기와 서황을 하동으로 보냈다(위지 "서황전"). 7월, 한수 등은 동관에서 조조군과 대치하며 9월까지 위수(渭水) 가에서 격전을 벌였으나 승패가 나지 않았다("무제기"). 이때 조조가 가후의 이간책을 써서 한수에게 회담을 제안했다. 한수는 자신의 아버지와 조조가 같은 해에 효렴으로 추천되었고 비슷한 시기에 군사를 일으켰다는 인연을 내세우며 조조와 옛 이야기를 나누는 등 친밀한 모습을 보였고, 이로 인해 마초 등 동맹 세력의 의심을 샀다. 게다가 조조가 일부러 한수에 대한 의심을 부추기는 내용의 편지를 마초에게 보내면서 불신은 더욱 깊어졌다. 조조는 이 틈을 노려 공격했고, 한수와 마초는 양주로 패주했다("무제기"). 이 일로 조조에게 인질로 보냈던 한수의 아들과 손자들이 모두 처형되었다.
214년, 마초가 저족과 연합하여 다시 반란을 일으켜 양주를 혼란에 빠뜨리자, 하후연이 양주 평정을 위해 공격해왔다("무제기", 위지 "하후연전"). 하후연은 마초를 토벌하는 동시에 양주의 저항 세력을 완전히 제거할 생각으로 한수에게도 군사를 보냈다. 한수는 이민족과 연합하여 격렬히 저항했으나 하후연의 군사력에 밀려 패배하고 금성(또는 서평)으로 도주했다("하후연전"). 부하였던 염행에게 배신당하는 등 세력이 약화된 한수는 익주의 유비에게 의탁할까 고민하며 부하 성공영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으나, 성공영이 계속 싸울 것을 주장하자 그 뜻을 따랐다("장기전"이 인용한 『전략』 및 『위략』).
215년, 조조가 장로 토벌을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왔다(양평관 전투). 서평과 금성에 기반을 둔 국연, 장석 등은 한수를 살해하고 그 목을 조조에게 보냈다. 이때 한수의 나이는 70여 세였다("무제기"가 인용한 『전략』).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다른 설도 있는데, 하후연에게 패한 후 서평의 곽헌에게 의탁해 있다가 병사했으며, 사후에 그의 목을 베어 조조에게 바친 자들이 있었다고도 한다(위지 "왕수전"이 인용한 『위략』 "순고전").
4. 2. 대립과 갈등
건안 13년(208년), 과거 의형제를 맺었던 마등과 사이가 극도로 나빠져 원수처럼 지내게 되었다. 이전에도 두 사람은 량주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며 서로의 아내와 자식을 죽이는 등 격렬한 대립을 벌인 바 있었다. 조정에서는 종요를 보내 둘을 화해시키고, 마등을 위위로 임명하여 수도인 업으로 불러들였다. 마등은 처음에는 떠나기를 꺼렸으나, 조정의 거듭된 재촉에 결국 업으로 향했다. 마등이 떠난 후, 그의 아들 마초가 아버지의 군대를 일부 통솔하게 되었다.
건안 15년(210년), 한수는 전년도에 옹주 자사 감릉상(또는 한단상)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킨 무위태수 장맹을 토벌하라는 상소를 올리고 공격에 나섰다. 장맹 휘하의 관리와 백성들마저 한수에게 합세하여 장맹을 공격하자, 결국 장맹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건안 16년(211년) 3월, 조조가 종요와 하후연에게 군사를 주어 한중의 장로를 공격하게 하자, 관중의 여러 세력들은 조조의 실제 목표가 자신들이 아닌지 의심하며 불안에 떨었다. 이에 한수는 마초, 양추, 성의, 이감 등 관중의 여러 장수들과 연합하여 10만 대군을 일으켜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
한수와 마초 연합군은 초반에 장안과 동관을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으나, 동관 전투에서 조조의 교묘한 이간계에 휘말렸다. 조조는 한수와 단독으로 만나 과거의 친분만을 이야기하며 전쟁 관련 언급을 피했고, 이후 마초에게는 일부러 내용을 고쳐 쓴 편지를 보내 한수에 대한 의심을 증폭시켰다. 마초는 한수가 조조와 내통한다고 의심하기 시작했고, 이는 서량 연합군의 내부 분열로 이어졌다. 조조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총공격을 감행했고, 결국 한수와 마초 연합군은 크게 패하여 량주로 달아났다. 이듬해인 212년, 조조는 서량군의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업에 있던 마등과 그의 삼족을 처형했다. 또한 인질로 잡혀 있던 한수의 자녀와 손자들도 이때 몰살당한 것으로 보인다.
건안 19년(214년), 현친현에 주둔하던 한수는 하후연의 공격을 받고 다시 도주했다. 하후연이 한수 군사들의 가족이 있는 장리(長離)의 강족을 공격하자 한수는 지원군을 보냈으나 격파당했고, 하후연은 이 기세로 흥국(興國)의 저(氐)족까지 항복시켰다. 한수의 세력은 더욱 약화되었고, 부하였던 염행마저 그를 배신했다. 한수는 익주의 유비에게 의탁할 생각도 했으나, 부하 성공영의 만류로 항전을 이어가기로 했다.
건안 20년(215년), 조조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한중의 장로를 정벌하고(양평관 전투) 서쪽의 저족까지 항복시키자 한수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결국 그 해 여름, 서평과 금성에 근거지를 둔 부하 국연과 장석(蔣石) 등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나이 70여 세였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하후연에게 패한 후 서평의 곽헌에게 의탁해 지내다 병사했으며, 사후에 그의 목이 조조에게 보내졌다고도 한다. 어느 쪽이든 그의 목은 조조에게 보내졌고, 그를 따르던 잔존 세력은 모두 항복했다.
4. 3. 조정의 중재와 화해
동탁 사후 192년 말, 이각, 곽사 등이 여포를 몰아내고 장안에서 정권을 잡자, 한수와 마등은 이들에게 공순의 뜻을 보이며 장안으로 갔다. 한수는 진서장군에 임명되어 양주로 돌아갔고, 마등은 정서장군에 임명되어 미에 주둔했다.그러나 194년, 마등은 마음을 바꿔 조정의 반(反)이각 세력 및 익주의 유언과 연합하여 장안을 공격했다. 한수는 이 소식을 듣고 마등과 이각 등을 화해시키려 했으나 실패하자 결국 마등과 합류했다. 하지만 유언 등과의 기습 계획이 누설되면서, 한수와 마등은 번조와 곽사에게 크게 패했다. 이때 한수는 진창까지 도망쳤다가 번조에게 따라잡혔으나, 과거 안면이 있던 사이였기에 번조가 그를 놓아주었다.
이후 양주로 돌아온 한수와 마등은 의형제를 맺는 등 처음에는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양주의 지배권을 두고 격렬하게 대립하기 시작했으며, 서로의 아내와 자식을 죽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둘 사이의 화해는 더욱 어려워졌다.
197년, 원소와의 관도 전투를 앞두고 있던 조조는 관중 지역의 혼란을 수습하고자 종요를 사예교위로 임명하고 관중의 군무를 감독하게 했다. 종요는 장안에 거점을 두고 장기를 사자로 보내 한수와 마등의 대립을 중재하려 했다. 장기와 당시 양주목사였던 위단의 중재 끝에 한수는 마등과의 싸움을 멈추기로 맹세하고, 자신의 아들을 인질로 보내며 조조에게 귀순했다. 이후 한수와 마등은 원소와의 남은 전투에서 조조를 도왔다. 나중에 마등은 업으로 소환되었고, 한수는 마등의 아들 마초와 함께 양주를 지키게 되었다.
5. 조조와의 대립 및 최후 (208년 ~ 215년)
건안 13년(208년), 한때 의형제를 맺었던 마등과 사이가 극도로 나빠져 원수처럼 지내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종요를 파견해 둘을 화해시키려 했고, 마등을 위위로 임명하여 수도인 업으로 불렀다. 마등은 처음에는 떠나기를 주저했으나, 조정의 계속된 재촉에 결국 업으로 향했고, 그의 아들 마초가 편장군(偏將軍)에 임명되어 남게 되었다.[1][2] 이는 훗날 한수와 마초가 연합하고 또 갈라서게 되는 배경이 된다.
건안 16년(211년), 조조가 한중의 장로를 공격한다는 명분으로 종요와 하후연에게 군대를 주어 서쪽으로 보내자, 한수를 비롯한 관중의 여러 세력들은 조조의 진짜 목표가 자신들이라고 의심했다. 이에 한수는 마초, 양추, 성의, 이감 등과 연합하여 10만 대군을 일으켜 조조에게 맞섰다.[3] 이들은 초반에 장안과 동관을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으나, 동관 전투에서 조조가 펼친 이간계에 넘어가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조조는 한수와의 단독 회담에서 옛 정을 내세우며 친근하게 대화하여 마초의 의심을 샀고, 결정적으로 조작된 편지를 보내 둘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았다. 내부 분열로 힘을 잃은 연합군은 조조의 총공격에 크게 패배했고, 한수와 마초는 서량으로 달아났다. 이듬해인 212년, 조조는 이 반란에 대한 보복으로 업에 있던 마등과 그의 삼족을 처형했으며, 이전에 인질로 보냈던 한수의 아들과 손자들 역시 모두 살해했다.
건안 19년(214년) 이후, 한수는 하후연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아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하후연은 한수의 근거지를 공격하고, 그를 지원하던 강족과 저족까지 격파하며 압박해왔다. 부하 염행에게 배신당하는 등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한수는 익주의 유비에게 의탁하는 방안까지 고려했으나, 부하 성공영의 만류로 강족, 저족과 연계하여 항전을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건안 20년(215년), 조조가 직접 저족 정벌에 나서 항복을 받아내자 한수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결국 그 해 여름, 금성 또는 서평에 머물던 한수는 부하였던 국연과 장석(蔣石) 등에게 살해당하며 70여 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병사한 후 그의 목이 조조에게 보내졌다고도 한다. 그의 죽음 이후 남은 세력은 모두 조조에게 항복했다.
5. 1. 장맹 토벌
209년, 장맹이 옹주 자사 감릉상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듬해 210년, 한수는 상소를 올려 장맹 토벌을 자청했고, 결국 장맹을 자결하게 만들었다.(위지 "방유전"이 인용하는 『전략』)5. 2. 동관 전투 (211년)
건안 16년(211년) 3월, 조조는 한중의 장로를 정벌한다는 명분 아래 종요와 하후연에게 군사를 주어 서쪽으로 보냈다("무제기"). 이 소식은 익주와 서량 지역에 큰 불안감을 안겨주었으며, 특히 서량의 한수, 마초 등은 조조의 진짜 목표가 자신들이라고 의심했다. 이에 한수는 마초, 양추, 성의, 이감 등 관중의 여러 세력과 손을 잡고 10만 대군을 일으켜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무제기"). 당시 홍농과 풍익의 많은 사람들이 이들에게 호응했으나, 두기가 태수로 있던 하동군만은 조조에게 충성을 지켰다고 한다(위지 "두기전", 위지 "배잠전"이 인용하는 『위략』 "엄간전"). 조조는 하동에 두기와 동군 출신인 서황을 파견했다(위지 "서황전").서량 연합군은 초반의 기세를 타고 장안과 동관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조조는 조인 등을 보내 동관에서 이들과 대치하게 했고, 211년 가을 7월부터 9월까지 위수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승패는 쉽게 결정되지 않았다("무제기"). 전황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조조는 책사 가후가 제안한 이간책을 채택했다.
조조는 한수에게 단독 회담을 제안했다. 한수는 과거 자신의 아버지와 조조가 같은 해 효렴이었고 비슷한 시기에 군사를 일으켰던 인연이 있었기에 회담에 응했다. 회담 자리에서 조조는 의도적으로 군사 관련 이야기는 피하고 옛 시절의 추억담만 나누며 친근하게 대했기 때문에, 마초 등에게 의심을 받았다. 회담이 끝난 후 마초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묻자 한수는 사실대로 답했지만, 마초는 이때부터 한수가 조조와 비밀리에 내통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조조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일부러 내용을 여러 군데 고치고 덧쓴 흔적이 보이는 편지를 한수에게 보내 마초의 의심을 더욱 키웠다. 마초는 이 편지를 보고 한수가 조조와 내통한 사실을 숨기려 한다고 확신했고, 이는 결국 서량 연합군의 내부 분열로 이어졌다.
조조는 연합군의 결속이 무너진 틈을 놓치지 않고 총공격을 개시했다. 내부 분열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한수와 마초 연합군은 크게 패배하고 양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무제기"). 조조는 이 반란에 대한 보복 조치로 212년 업에 머물고 있던 마등과 그의 일가족을 모두 처형했으며, 이전에 인질로 와 있던 한수의 아들과 손자들 역시 살해했다.
5. 3. 최후 (214년 ~ 215년)
건안 19년(214년), 현친현에 주둔하고 있던 한수는 하후연의 공격을 받자 달아났다. 이후 하후연이 한수 휘하 군사들의 가족이 있는 장리(長離)의 강족을 공격하자, 한수는 군사를 보내 강족을 지원했으나 하후연에게 격파당했다. 하후연은 이 기세를 몰아 흥국(興國)의 저족까지 항복시켰다. 이 무렵 한수는 부하 염행에게 배반당하는 등 세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한수는 익주의 유비에게 망명할 것을 고려하기도 했으나, 부하 성공영이 강족, 저족과 연대하여 항전을 계속할 것을 주장하자 이를 따랐다.건안 20년(215년), 조조가 직접 저족 정벌에 나서 항복을 받아내자 한수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결국 그 해 여름, 금성(또는 서평)에 머물던 한수는 부하였던 국연과 장석(蔣石) 등에게 살해당했다. 이때 나이는 70여 세였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하후연에게 패한 뒤 서평의 곽헌에게 의탁하던 중 병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목이 베어져 조조에게 보내졌다고도 한다. 어떤 경위로든 한수의 목은 조조에게 보내졌고, 그를 따르던 부하들은 모두 항복했다.
6. 삼국지연의에서의 한수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한수가 마등과 함께 이각을 공격한 이유가 헌제의 밀명을 받아 진서장군과 정서장군 직책을 약속받았기 때문이라고 설정되어 있다. 역사 기록과는 달리, 소설 속 한수는 마등과 동등한 군벌이 아닌 마등의 의형제이자 부하처럼 묘사되는데, 이는 한수가 사건에 직접 관여하기를 꺼리는 성향을 반영한 것일 수 있다.
마등이 조조에게 살해된 후, 한수는 마등의 아들인 마초의 충실한 동맹자로서 "팔부"라 불리는 여덟 명의 장수를 이끌고 조조에게 복수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다.
'''수하 팔부'''
조조와의 전투에서 한수와 마초는 고전을 면치 못한다. 조조의 책사 가후는 이간계를 사용하여 마초와 한수 사이를 벌어놓는다. 마초가 자신을 의심하자, 한수는 조조에게 투항할 것을 부하 장수들과 논의한다. 그러나 이 계획을 알아챈 마초가 분노하여 한수의 왼팔을 잘라버린다. 한수는 간신히 도망쳐 조조에게 투항했고, 조조는 그의 항복을 받아들여 서량후(西涼侯) 또는 관내후에 봉하고 하후연과 함께 양주에 남도록 했다.
또한, 소설에서는 211년 시점에 한수의 나이가 40세라고 기술되어 있어, 172년생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는 실제 역사 기록과 차이가 있다.
7. 한수를 섬긴 사람들
참조
[1]
서적
Dianlüe
[2]
서적
Sanguozhi
[3]
서적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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